흥해배씨 인물
興海裵氏 人物
고려 高麗
성명: 배경분(裵景分)
자: 미상
호: 미상
생몰: 미상
부: 미상
모: 미상
조부: 미상
외조부: 미상
배: 미상
장인: 미상
형제: 미상
자녀: 배광우(裵光祐)
관직: 검교장군(檢校將軍). 고려시대의 검교(檢校)는 문반 5품·무반 4품 이상의 관직에 설치된 **산직(散職)**이므로, 현재 전하는 ‘검교장군’이라는 관직명만으로 구체적인 실직이나 직무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품: 전하는 저술이나 작품 없음
묘소: 미상
시호: 미상
행장: 공의 휘는 경분(景分)이며 본관은 흥해(興海)이다.고려시대에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랐으며, 후세 흥해배씨가 세계를 기록할 때 공을 제1세 기세조(起世祖)**로 삼아 계대를 이어왔다.조선 선조 29년인 1596년에 세운 임연재 배삼익의 신도비에서도 흥해배씨의 선계를 서술하면서 “고려 때 경분이 있어 검교장군이 되었다(高麗時有景分爲檢校將軍)”고 기록하여 공의 이름과 관직을 전하고 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공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명확한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606년 배용길(裵龍吉)이 지은 「곡강가세구첩서(曲江家世舊牒敍)」에는 “검교공 이상은 증거로 삼을 문헌이 없다(檢校公以上 無文獻可徵)”고 하였다.이는 당시 문중에서도 검교공인 배경분 이전의 계통을 무리하게 확정하지 않고,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계의 출발점을 공에게 두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위키문헌)따라서 후대 일부 계보에서 공의 선계를 더 위로 연결하는 설이 전하더라도, 현전하는 초기 가승의 원칙에 따르면 공 이전의 계통은 문헌 부족으로 확정하기 어렵다.공에게는 아들 광우(光祐)가 있었으며 광우는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을 지냈다.그 뒤 약경(若卿)·유손(裕孫)·영지(榮至)로 계통이 이어지고, 영지의 아들 전(詮)이 고려 말 조정에서 현달하여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지면서 가문이 크게 드러났다.배삼익의 신도비 또한 경분에서 영지와 전으로 이어지는 선계를 기록하면서 “흥해의 배씨가 이로부터 더욱 현달하였다(興海之裵由是益顯)”고 하였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공의 생몰년과 부모·배위·묘소를 비롯한 구체적인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그러므로 공의 행장을 후대의 추정으로 장식하기보다는, 고려조 검교장군을 지냈다는 사실과 흥해배씨의 현전 세계가 공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것이 타당하다.공은 후손들에게 검교공(檢校公)으로 일컬어지며, 흥해배씨 계보의 기점을 이루는 선조로서 그 이름이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가승: 배경분(裵景分)〔1세·검교장군〕 → 배광우(裵光祐)〔2세·위위승동정〕 → 배약경(裵若卿)〔3세·위위승동정〕 → 배유손(裵裕孫)〔4세·좌우위보승별장〕 →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5세·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 배전(裵詮)〔6세·흥해군〕 → 후손으로 계승
성명: 배천희(裵千熙) (탑비: 千熙)
자: 미상
호: 설산(雪山)
생몰: 1307.5.21 ~ 1382.6.16
부: 배영지(裵榮至) (문중 전승 / 탑비에는 성명 결락, 전리판서)
모: 최씨(崔氏)
조부: 배유손(裵裕孫) (문중 전승)
외조부: 미상
배: 없음(13세 출가)
장인: 없음
형제: 배전(裵詮·裵佺) (문중 전승)
자녀: 없음
관직: 국사(國師),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원응존자(圓應尊者), 공부선 증명법사
작품: 『삼보일경관(三寶一鏡觀)』 약간 권
묘소: 확정 미상 (창성사에서 입적, 탑호 大覺圓照)
시호: 진각국사(眞覺國師)
진각국사(眞覺國師)의 휘는 천희(千熙)요, 호는 설산(雪山)이다. 흥해(興海) 사람으로, 고려 말 화엄의 법맥을 크게 떨치고 선교(禪敎)를 아울러 통섭한 고승이다.
공은 고려 충렬왕 33년 정미년인 1307년 5월 21일 흥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냈으며, 모친은 최씨(崔氏)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모친 최씨가 큰 배에 여러 승려가 타고 범패를 부르며 물이 문 앞까지 차오르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으며, 출산을 앞두고 다시 승려가 나타나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고 한다.
흥해배씨 가승에서는 국사를 전리판서 배영지(裵榮至)의 아들로 전하며, 흥해군(興海君) 배전(裵詮)과 같은 세대의 형제로 전승한다. 배영지는 구휘가 인검(仁儉)이며 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등의 관직을 지낸 인물이다. 국사의 탑비에서도 부친의 성명 부분은 마멸되어 전하지 않으나 부친이 전리판서였음과 국사가 흥해 사람임을 밝히고 있어 문중 가승과 서로 부합하는 점이 있다. 다만 부친의 성명이 탑비에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오늘날에는 이 계통을 문중의 전승 계보로 함께 기록함이 마땅하다.
국사는 어려서부터 세속에 뜻을 두지 않고 불법을 사모하였다. 열세 살이 되던 1319년 화엄종 반룡사(盤龍社)의 주지 일비대사(一非大師)에게 몸을 의탁하여 삭발하고 출가하였다. 일찍부터 총명하고 뜻이 높았으며 수행에 전념하여 열아홉 살에 승과의 상품선(上品選)에 올랐다.
그 뒤 금생사(金生寺)·덕천사(德泉寺)·부인사(符仁寺)·개태사(開泰寺)를 비롯한 십여 사찰에 주석하였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의복과 음식에 사치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 뜻과 지조가 높았다고 비문은 전한다.
국사는 화엄의 교학에만 머무르지 않고 선지(禪旨)를 깊이 참구하였다. 소백산·금강산·오대산 등 여러 산문을 두루 유력하며 수행하였고, 마침내 중국 강남의 불교계를 직접 찾아가 법을 구하고자 뜻을 세웠다.
공민왕 13년인 1364년 가을에는 바다를 건너 원나라 항주(杭州)에 이르렀다. 휴휴암(休休菴)의 몽산(蒙山) 법맥과 관련된 도량을 찾아 수행하였으며, 여러 기이한 일화가 후대 문인들에게 전해졌다. 이어 성안사(聖安寺)의 만봉(萬峯)을 찾아 참문하였는데, 그의 수행과 깨달음을 인정받아 가사와 선장(禪杖)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국사가 귀국하자 공민왕은 매우 두터이 예우하였다. 그러나 국사는 곧바로 권세와 명예를 좇지 않고 치악산에 숨어 수행하였으며, 다시 동해와 낙산 등을 유력하였다.
공민왕 16년인 1367년 정월 치악산으로 돌아오자 왕이 세 차례나 사신을 보내 조정으로 나올 것을 청하였다. 국사는 거듭된 부름을 받은 뒤 그해 5월에 비로소 왕명에 응하였다.
공민왕은 국사를 높이 받들어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傳佛心印)
대지무애(大智無碍)
성상원통(性相圓通)
원응존자(圓應尊者)
등의 존호를 내렸으며 별도로 부(府)를 설치하고 요속을 두었으며, 인장과 법복을 하사하였다.
국사가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되자 그의 고향 흥해 또한 영예를 입었다. 같은 해 고려 조정에서는 흥해가 국사 천희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고을의 격을 높여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 한 사람의 덕망으로 그 향리까지 높아진 것으로, 당시 국사의 위상이 어떠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공민왕 19년인 1370년에는 왕사 나옹 혜근(懶翁 惠勤)이 주관한 공부선(功夫選)에서 국사가 증명법사(證明法師)가 되어 선교 여러 승려의 수행을 살폈다. 이는 국사가 화엄종의 고승일 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 불교 전체에서 선과 교를 함께 판단할 수 있는 권위를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그 뒤 경천사(敬天寺)에 머물렀다가 1371년 금강산을 유력하였다. 공민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 국사를 불러들였으나 그해 가을 국사는 치악산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하였다.
1372년에는 화엄종의 근본 도량 가운데 하나인 부석사(浮石寺)에 주석하였다. 국사는 오래되어 쇠락한 전각을 다시 일으키고 사찰의 여러 건물을 옛 모습과 같이 중영하였다. 이는 자신의 사후에도 화엄의 법등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국사는 수행과 교화에 힘쓰는 한편 교학을 정리하여 『삼보일경관(三寶一鏡觀)』 몇 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당시 세상에 유행하였다고 탑비가 전한다. 오늘날 전하지 않아 그 전모를 알 수 없으나, 책의 이름으로 보아 불·법·승 삼보(三寶)를 하나의 근원적 관점에서 조명한 저술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국사의 사상과 교학을 직접 보여주었을 귀중한 저술이었다.
국사는 만년에 수원 광교산 창성사(彰聖寺)에 머물렀다.
우왕 8년인 1382년 6월 16일, 국사는 창성사에서 세연을 마쳤다. 세수는 일흔여섯이요 법랍은 예순셋이었다.
국사가 입적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높은 덕과 공적을 기려 시호를 진각국사(眞覺國師)라 내리고, 탑호를 대각원조(大覺圓照)라 하였다.
국사의 문인들은 스승의 행적을 모아 행장을 지었고, 조정에서는 당대의 대문장가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다. 이색은 처음에는 문인들이 가져온 행장이 국사의 행적을 모두 갖추지 못하였다 하여 쉽사리 붓을 들지 않았으나, 국사를 직접 시봉하여 중국에 다녀온 제자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비문을 완성하였다.
우왕 12년인 1386년 정월 문인들이 비를 세웠으며, 비구 혜잠(惠岑)이 글을 새겼다. 이것이 오늘날 전하는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이다.
국사는 고려 말 불교계가 크게 변화하던 시대에 화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선의 수행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국내의 명산과 여러 사찰을 유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다를 건너 중국 강남의 선지식을 직접 참방하였으며, 귀국한 뒤에는 한 종파의 문호에 머물지 않고 선교를 통섭하는 국사로 존숭되었다.
왕이 세 번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쉽게 산문을 떠나지 않았고, 국사로 책봉된 뒤에도 다시 산으로 돌아가 수행하기를 청하였다. 부석사에 머물러 전각을 중수하고 후세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일생 동안 법을 닦고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그의 덕망으로 고향 흥해의 읍격까지 높아졌으니, 이는 고려 일대의 승려 가운데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흥해의 후손들에게 국사는 단지 한 시대의 이름 높은 승려에 그치지 않는다. 고향 흥해의 이름을 나라 안에 드높이고, 학문과 수행으로 한 시대의 국사가 되었으며, 자신의 안락보다 후세에 법을 전하는 일을 앞세운 선현이었다.
이색은 국사의 비명 끝에서 국사의 도를 기리며, 마음을 잃지 않으면 꿈과 깨어 있음이 하나가 되고 그 법의 밝음이 해와 같다고 찬하였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국사의 이름은 창성사의 비석과 『고려사』의 기록에 남아 있으며, 흥해 또한 그가 국사였던 까닭에 고을의 격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역사에 전하고 있다.
이에 그 생애와 행적을 삼가 기록하여 후손들이 그 뜻과 학덕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한다.
진각국사 설산 천희.
세속의 영달을 가까이하지 않고 불도에 뜻을 세웠으며, 바다를 건너 법을 구하고 돌아와 나라의 스승이 되었으되 다시 산림으로 돌아가기를 구하였다. 화엄의 법등을 밝히고 선교를 아울렀으며, 부석사를 중흥하고 후학을 이끌어 고려 말 불교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 높은 이름과 법덕은 국사의 고향 흥해와 더불어 길이 전할 것이다.
배경분(裵景分)
→ 배광우(裵光祐)
→ 배약경(裵若卿)
→ 배유손(裵裕孫)
→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
├─ 진각국사 천희(千熙, 1307~1382)
└─ 흥해군 배전(裵詮)
→ 배상도·배상경·배상지·배상공
※ 진각국사 천희의 탑비에는 본인이 흥해 사람이고 부친이 전리판서, 모친이 최씨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흥해배씨 가승에서는 전리판서를 지낸 배영지를 국사의 부친으로 전한다. 다만 현전 탑비의 부친 성명 부분이 마멸되어 있으므로, 사료적으로는 ‘배영지의 아들’이라는 관계를 문중 전승과 탑비의 정황이 서로 부합하는 계보로 기록한다.
성명:배전(裵佺·裵詮)
자:미상
호:미상
생몰:미상 ~ 1361년(공민왕 10)
부:배영지(裵榮至), 구휘 인검(仁儉), 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모:성명 미상. 『고려사』에 궁비(宮婢)라고 기록
조부:배유손(裵裕孫)
외조부:미상
배:타양군부인 손씨(沱陽郡夫人 孫氏)
장인:손홍량(孫洪亮, 1287~1379), 판삼사사·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 시호 정평(靖平)
형제:**진각국사 천희(千熙)**로 전함 (문중 가승)
자녀:상도(尙度)·상경(尙絅)·상지(尙志)·상공(尙恭). 가승에는 사위 **김용휘(金用輝)·이의화(李義和)·여중엄(余仲淹)·강석복(康錫福)**도 기록
관직:호군(護軍)·군부판서(軍簿判書)·행성이문(行省理問)·삼중대광(三重大匡)·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 조적의 난 때 일등공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짐
작품:전하는 저술·작품 없음
묘소:미상. 가승에는 배위 타양군부인 손씨 묘를 **파주 조리면 오산리 응봉 아래 해좌(亥坐)**라 기록하고 유갈(有碣)이라 함
시호:확인되지 않음
공의 휘는 전(佺)이며, 족보에는 전(詮)으로도 기록한다.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부친은 배영지(裵榮至)로 구휘는 인검(仁儉)이며, 봉익대부 지밀직사사·평양윤·전리판서·상호군을 지냈다. 조부는 배유손(裵裕孫)이다.
『고려사』에는 공을 흥해 사람이라 하고 그 어머니가 궁비(宮婢)였다고 기록하였다. 흥해배씨 가승에서는 진각국사 천희(千熙)와 형제로 전하나, 천희의 현전 탑비에서 부친의 성명이 마멸되어 있으므로 이 관계는 문중의 가승으로 전한다.
공의 생년은 전하지 않으며 공민왕 10년인 1361년에 졸하였다.
공은 고려 충혜왕의 가까운 신하로 발탁되어 여러 차례 승진한 뒤 호군(護軍)이 되었다. 왕의 측근에서 국가의 기무를 담당하였으며, 뒤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랐다.
충숙왕 복위 8년인 1339년 조적(曹頔)이 난을 일으키자 공은 충혜왕을 시종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다. 가승에는 이를 일등좌명원훈(一等佐命元勳)이라 기록하고, 공이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공이 흥해군에 봉해진 뒤에도 고려 조정에서의 지위는 높았다. 충목왕 즉위년인 1344년 왕세자의 교육을 위한 서연(書筵)을 설치할 때, 우정승 채하중·좌정승 한종유·이제현·박충좌 등 당대의 고위 대신들과 함께 흥해군 배전의 이름도 시독에 참여할 인물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공이 고려 조정의 최고위 관료층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은 원나라와 고려를 오가며 활동하였으며, 덕녕공주와 가까운 관계 속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충정왕 때에는 정동행성의 행성이문(行省理問)이 되었다.
그러나 공의 정치적 생애가 공훈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고려사』는 공을 「폐행전(嬖幸傳)」에 수록하면서 충혜왕과 덕녕공주를 배경으로 권세를 행사한 일을 비판적으로 기록하였다. 충정왕 때에는 왜구와 관련된 뇌물 사건으로 원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뒤에 사면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고 이제현(李齊賢)이 권성(權省)이 되어 정국을 정비할 때 공은 정동행성의 옥에 갇혔다. 그러나 공민왕이 공을 용서하여 석방하였다. 『고려사』는 이 과정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비판까지 함께 기록하고 있다.
이후 공은 약 10년을 더 살다가 공민왕 10년인 1361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의 배위는 타양군부인 손씨(沱陽郡夫人 孫氏)이다. 손씨의 부친은 고려 후기의 명신 손홍량(孫洪亮)으로 판삼사사를 지내고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손홍량은 공민왕 때 원로 대신으로 특별한 예우를 받았던 인물이므로, 공은 당대의 유력한 관료가문과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공에게는 상도(尙度)·상경(尙絅)·상지(尙志)·상공(尙恭) 네 아들이 있었다. 이 네 아들의 이름은 흥해배씨 가승뿐 아니라 『고려사』의 공의 열전에도 직접 기록되어 있다.
장남 상도는 공민왕조에 문과에 올라 보문각직제학에 이르렀고, 상경도 문과에 올랐다. 셋째 상지는 후일 백죽당(栢竹堂)이라 불리며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에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인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넷째 상공 역시 문과에 올라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이들 후손을 통하여 흥해배씨의 여러 계통이 이어졌다.
공의 생애는 고려 후기 원 간섭기와 공민왕대의 복잡한 정치 현실 한가운데에 있었다. 충혜왕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군사와 정무의 요직을 지냈고, 조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일등공신과 흥해군의 봉작을 받았다. 한편 왕실과 원나라를 둘러싼 권력 관계에 깊숙이 참여하면서 정치적 부침과 비판 또한 함께 겪었다.
그러므로 공을 살필 때에는 후대의 가승에 전하는 공훈만이 아니라 『고려사』가 남긴 비판적인 기록 역시 함께 보아야 한다. 이는 한 인물의 공과 과를 숨기지 않고 그가 살았던 고려 후기의 정치 현실 속에서 생애 전체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공은 1361년에 졸하였으며, 네 아들을 통하여 후손이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상도와 상지의 후계에서 많은 문신과 학자가 배출되어 흥해배씨 가문의 중요한 계통을 이루었다.
이에 사서와 가승에 전하는 사실을 모아 공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의 참고로 삼는다.
가승:경분 → 광우 → 약경 → 유손 → 영지 → 전 → 상도·상경·상지·상공
고려 高麗 → 조선 朝鮮
파조 派祖 직제학공 直提學公
배상도 裵尙度
성명: 배상도(裵尙度)
자: 미상
호: 미상
생몰: 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우왕대 활동
부: 배전(裵詮·裵佺), 흥해군(興海君)
모: 타양군부인 손씨(沱陽郡夫人 孫氏)
조부: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 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외조부: 손홍량(孫洪亮, 1287~1379), 판삼사사·복원부원군(福原府院君), 시호 정평(靖平)
배: 진주강씨(晉州姜氏)
장인: 미상
형제: 배상경(裵尙絅)·배상지(裵尙志)·배상공(裵尙恭). 누이 4인이 있었으며 사위로 김용휘(金用輝)·이의화(李義和)·여중엄(余仲淹)·강석복(康錫福)이 전함
자녀: 아들 배둔(裵屯)
관직: 공민왕 18년(1369) 기유방 문과 병과 급제. 중현대부(中顯大夫)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작품: 현전하는 저술은 확인되지 않음.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여러 차례 이색의 장허(獎許)를 받고 증시(贈詩)를 받았다고 전함
묘소: 경기도 파주 조리면 오산리(梧山里) 일대로 전함. 배위 진주강씨 묘는 공의 묘 청룡등 아래 자좌(子坐)에 있으며 표갈(表碣)이 있었다고 전함
시호: 미상
공의 휘는 상도(尙度)이며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부친은 충혜왕 때 호군과 군부판서를 거쳐 조적의 난에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흥해군에 봉해진 배전(裵詮)이며, 조부는 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을 지낸 배영지(裵榮至)이다. 모친은 타양군부인 손씨로, 외조부는 고려 후기의 명신 정평공 손홍량(孫洪亮)이다. 공은 일찍이 당대의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공민왕 18년인 1369년 기유방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같은 방에는 권근(權近)·서견(徐甄) 등 고려 말의 명사들이 있었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 중현대부 보문각직제학에 이르렀다. 우왕 초 정도전(鄭道傳)이 북원 사신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반대하다 회진현으로 유배될 때, 염흥방이 배상도를 보내 정도전에게 잠시 출발을 늦추라고 권하게 한 사실이 『고려사』에 전한다. 이 기록으로 보아 공이 당시 중앙 정계의 고위 관료들과 교유하며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은 특히 목은 이색에게 수학하여 여러 차례 학문과 재능을 인정받고 시를 증정받았다고 전하니, 고려 말 신진 유학자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문신이었다. 배위는 진주강씨이며 아들 둔(屯)을 두었다. 둔은 고려가 망한 뒤 조선 태조 2년인 1393년 진사·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와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함으로써 가문의 문맥을 이어갔다. 공의 생몰년과 시호는 전하지 않으나,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고 보문각직제학을 지낸 문신이자 목은 이색 문하의 학인으로서 흥해배씨 초기 문맥을 이어간 인물이다.
가승: 배경분(裵景分) → 배광우(裵光祐) → 배약경(裵若卿) → 배유손(裵裕孫) → 배영지(裵榮至) → 배전(裵詮) → 배상도(裵尙度) → 배둔(裵屯)
파조 派祖 백죽당공 栢竹堂公
배상지 裵尙志
성명: 배상지(裵尙志)
자: 미상(不傳). 일부 후대 자료에서 ‘부전’을 자처럼 적은 사례가 있으나, 不傳은 ‘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호: 백죽당(栢竹堂). 백당(栢堂)으로도 지칭됨.
생몰: 1351년(충정왕 3) ~ 1413년(태종 13) 7월 27일, 향년 63세. 1390년 호구자료에 당시 나이 40세로 기록되어 1351년생임을 확인할 수 있다. (JSG)
부: 배전(裵詮·裵佺). 성근선력익대좌명공신(誠勤宣力翊戴佐命功臣)·삼중대광(三重大匡)·첨의평리(僉議評理)·흥해군(興海君). 1390년 호구자료에 부자관계가 직접 기록되어 있다. (JSG)
모: 타양군 손씨(沱陽郡孫氏). 정평공 **손홍량(孫洪亮)**의 딸.
조부: 배영지(裵榮至), 구휘 인검(仁儉). 봉익대부·지밀직사사·평양윤·행전리판서·상호군. (JSG)
외조부: 손홍량(孫洪亮, 1287~1379). 보절좌리공신·삼중대광·판삼사사·상호군·직성군, 시호 정평(靖平). (JSG)
배: 영가군부인 안동권씨(永嘉郡夫人 安東權氏). 1390년 호구자료에 41세로 기록되어 있으며, 배상지와 함께 등재되어 있다. (JSG)
장인: 권희정(權希正). 좌우위보승낭장(左右衛保勝郎將) 겸 감찰규정(監察糾正). 후대 기록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한 것으로 전한다. (JSG)
형제: 형 배상도(裵尙度)·배상경(裵尙絅), 아우 배상공(裵尙恭). 누이 4인이 있었으며 각각 **김용휘(金用輝)·이의화(李義和)·여중엄(余仲淹)·강석복(康錫福)**에게 출가한 것으로 전한다. 『고려사』에도 배전의 아들로 상경·상도·상지·상공 네 형제의 이름이 확인된다. (국가기록원)
자녀: 아들 배권(裵權)·배환(裵桓)·배남(裵楠)·배강(裵杠)·배주(裵柱). 딸 1인은 **이승직(李繩直)**에게 출가. 이 가운데 권은 지평공파, 환은 관찰사공파, 남은 감찰공파, 강은 정랑공파의 계통을 이루었다.
관직: 고려조에 **음사(蔭仕)**로 출사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1390년 호구자료에는 정확히 **「前通訓大夫判司僕寺事」**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 배환이 현달한 뒤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후일 사림의 소청으로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JSG)
작품: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전하며 상당수가 유실되었다. 또한 후대에 공의 행적과 유문을 모은 『백죽당선생실기(栢竹堂先生實紀)』가 편찬되었다. 전승에는 시 천여 수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
묘소: 안동 와룡면 가수천(佳水川), 자좌(子坐). 옛 『영가지』에서도 배상지의 묘가 안동부 북쪽 가수천 북산에 있다고 기록한다. 묘와 관련하여 참봉 **이보(李簠)**가 유사를 짓고 참판 **권해(權瑎)**가 갈명을 지은 것으로 전한다. (경주이씨 월성군후 용재공파)
시호: 확인되지 않음. 다만 후대에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다. 경광서원은 배상지·이종준·장흥효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행장: 공의 휘는 상지(尙志)이고 본관은 흥해(興海)이며, 호는 백죽당(栢竹堂)이다.고려 충정왕 3년인 1351년에 태어났다.부친은 충혜왕 때 공을 세워 흥해군에 봉해진 배전(裵詮)이고, 조부는 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을 지낸 배영지(裵榮至)이며, 외조부는 고려 말의 명신 정평공 손홍량(孫洪亮)이다.1390년 개성부 호구자료에는 공이 40세의 흥해인으로 전 통훈대부 판사복시사(前通訓大夫判司僕寺事)였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공의 생년과 관직 및 가계는 고려 말 호구자료를 통하여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된다. (JSG)공은 일찍이 당대의 대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고 전한다.형제인 상도·상경·상공 또한 문학과 관직으로 이름을 나타내어, 고려 말 흥해배씨 문맥의 중심 세대를 이루었다.공은 과거를 통한 출사보다 음사로 관직에 나아가 판사복시사에 이르렀으며, 고려 왕조의 국운이 쇠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공에 관한 후대의 실기와 가승에는 사행으로 중국에 들어갔을 때 중서랑(中書郞)과 대등한 예를 행하며 굽히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하며, 이를 통해 공의 강직한 기상을 기리고 있다.또한 1392년 포은 정몽주가 순절하고 고려가 멸망하자, 동지들과 함께 불조현(不朝峴)에서 각자의 뜻을 밝히고 관을 걸어두었다는 전승과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다만 이러한 두문동 관련 행적은 동시대 호구자료가 아니라 후대 실기·가승을 중심으로 전하는 절의 전승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문중 전승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공은 이후 안동의 금계촌(金溪村)에 은거하였다.거처 주변에 잣나무와 대나무[栢竹]를 심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나타내고, 마침내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아 백죽당(栢竹堂)이라 하였다.한국고전번역원의 인물정보에서도 공을 고려 말 정국이 혼란해지자 안동 금계에 은거하고, 조선 초 여러 차례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정리하고 있다. (고전용어 시소러스)공은 시문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전한다.후대 기록에는 시집이 있었으며 천여 수의 시가 세상에 전했다고 하나 대부분 유실되었다고 한다.사가정 서거정(徐居正)은 후세에 공의 출처와 절의를 높이 평가하였고, 서애 류성룡(柳成龍) 또한 공에게 높은 절개와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고 칭송한 것으로 전한다.공은 안동에 정착한 뒤 자손을 교육하여 배권·배환·배남·배강·배주 다섯 아들을 두었으며, 이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문과와 관직으로 현달하였다.특히 배환은 예문관직제학·병조참의와 여러 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배강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지내는 등 후손들이 조선 초기 문신가로 성장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공은 1413년 7월 27일, 향년 63세로 졸하였다.후일 아들 배환의 현달로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다시 사림의 공론으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또한 후세 유림은 공의 불사이군의 절의와 학덕을 높여 안동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공은 고려 말의 문신이면서 왕조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새 왕조의 벼슬을 구하지 않고 안동 금계에 은거하여 자신의 뜻을 지킨 인물로 기억되었다.그가 심은 백(栢)과 죽(竹)은 뒤에 공의 절의를 상징하는 표지가 되었으며, 공은 흥해배씨가 안동에 뿌리를 내리는 데 중심이 된 안동 입향조로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임연재)
가승: 배경분(裵景分)〔검교장군〕 → 배광우(裵光祐)〔위위승동정〕 → 배약경(裵若卿)〔위위승동정〕 → 배유손(裵裕孫)〔좌우위보승별장〕 →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 배전(裵詮·裵佺)〔흥해군〕 → 배상지(裵尙志, 백죽당) → 배권(裵權)〔지평공파〕 · 배환(裵桓)〔관찰사공파〕 · 배남(裵楠)〔감찰공파〕 · 배강(裵杠)〔정랑공파〕 · 배주(裵柱) / 녀 → 이승직(李繩直)
전서공 典書公
배상공 裵尙恭
성명: 배상공(裵尙恭)
자: 미상
호: 미상
생몰: 생몰년 미상. 고려 말 활동하였으며 중년에 졸한 것으로 전함.
부: 배전(裵詮·裵佺). 흥해군(興海君).
모: 타양군부인 손씨(沱陽郡夫人 孫氏)
조부: 배영지(裵榮至). 구휘 인검(仁儉). 봉익대부·지밀직사사·평양윤·전리판서·상호군.
외조부: 손홍량(孫洪亮). 판삼사사·복원부원군(福原府院君). 시호 정평(靖平).
배: 정부인 영가김씨(貞夫人 永嘉金氏)
장인: 김성옥(金成玉). 부정(副正).
형제: 배상도(裵尙度)·배상경(裵尙絅)·배상지(裵尙志). 여형제 4인이 있었으며 각각 김용휘(金用輝)·이의화(李義和)·여중엄(余仲淹)·강석복(康錫福)에게 출가한 것으로 전함.
자녀: 아들 배소(裵素). 생원으로 1408년(태종 8)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이조정랑에 이름.
관직: 고려 공민왕조 문과 급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름.
작품: 현전하는 저술·작품은 확인되지 않음.
묘소: 안동 풍산면 철곡(鐵谷) 간좌(艮坐). 갈명(碣銘)이 있었으며, 배위 정부인 김씨도 같은 묘역에 장사됨.
시호: 미상
행장: 공의 휘는 **상공(尙恭)이며 본관은 흥해(興海)이다.부친은 고려 충혜왕 때 현달하여 흥해군에 봉해진 배전(裵詮)이고, 조부는 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을 지낸 배영지(裵榮至)이다.모친은 타양군부인 손씨로 고려 말의 명신 정평공 손홍량(孫洪亮)의 딸이다.공은 상도(尙度)·상경(尙絅)·상지(尙志)와 형제이며 그 가운데 백죽당 배상지의 아우이다.공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마침내 가선대부 공조전서(嘉善大夫工曹典書)**에 이르렀다고 전한다.공은 가문의 문학과 관직의 전통을 이어 고려 말 중앙 관료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의 추중을 받았다.그러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던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형 배상지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안동에 정착하였다.공이 자리 잡은 곳은 **안동 풍산의 하회촌(河回村)**이었다.이때 풍산류씨의 하회 입향조인 **공조전서 류종혜(柳從惠)**와 깊은 교분을 맺었다.류종혜는 공과의 우의를 중히 여겨 자신이 경영하던 전원(田園)의 절반을 나누어 공에게 주고 같은 마을에 거처하게 하였다고 전한다.두 사람은 모두 전서(典書)를 지낸 옛 벗으로 서로 지팡이를 짚고 왕래하며 가까이 지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가리켜 ‘하회이전서(河回二典書)’, 곧 ‘하회의 두 전서’라고 불렀다.이는 배상공과 류종혜의 교분뿐 아니라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하회마을 초기 정착사의 중요한 일화로 전해진다.공의 배위는 정부인 영가김씨로 부정 김성옥(金成玉)의 딸이다.김씨 또한 영가의 세족 출신으로 전하며, 공과 더불어 가문을 이루었다.공에게는 아들 소(素)가 있었다.배소는 학문과 문행이 뛰어나 1408년 태종 8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정랑에 이르렀으며, 후대에는 그 풍도가 준정하여 ‘매가 조정에 우뚝 선 것 같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전한다.공은 생몰년이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중년에 집에서 졸한 것으로 전한다.장례는 **풍산 철곡의 언덕 간좌(艮坐)**에 예장하였으며 묘에는 갈명이 세워졌다.
관찰사공 典書使公
배둔 裵屯
성명: 배둔(裵屯)
자: 미상
호: 미상
생몰: 1374년(공민왕 23) ~ 미상. 『국조문과방목』 계통 자료에서 생년을 **갑인년(1374)**으로 기록한다. (KDP)
부: 배상도(裵尙度). 중현대부 보문각직제학(中顯大夫 寶文閣直提學).
모: 미상. 조모는 타양군부인 손씨(沱陽郡夫人 孫氏).
조부: 배전(裵詮·裵佺). 일등좌명공신·삼중대광 도첨의평리·흥해군(興海君). 문과방목에서도 조부를 배전으로 기록한다. (KDP)
외조부: 미상
배: 미상
장인: 미상
형제: 미상
자녀: **배처눌(裵處訥)·배지눌(裵止訥)**로 전한다. 처눌은 **맹산현감(孟山縣監)**을 지낸 것으로 전한다. (나무위키)
관직: 1393년(태조 2) 계유 식년시 문과 동진사 급제.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좌사간(左司諫)·형조우참의(刑曹右參議)·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등을 역임하였다. 가승에는 **형조참의·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KDP)
작품: 현전하는 개인 문집이나 저술은 확인되지 않음. 다만 사간원 관원으로 여러 차례 국정에 관한 상소에 참여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전한다. (조선왕조실록)
묘소: 선고(先考) 묘 아래 자좌(子坐). 즉 부친 배상도의 묘 아래쪽에 자좌로 장사되었다고 전한다. 구체적인 현 행정지명은 추가 고증이 필요함.
시호: 미상
공의 휘는 둔(屯)이고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부친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현대부 보문각직제학을 지낸 배상도(裵尙度)이며, 조부는 충혜왕 때 공을 세워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진 배전(裵詮)이다. 공은 1374년에 태어났다. 조선이 개국한 이듬해인 1393년 태조 2년 계유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새 왕조의 관료로 출사하였다. 당시 전력은 생원(生員)이었으며 문과 급제 뒤 여러 내외직을 거쳤다. (KDP) 세종 12년인 1430년에는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으로 있으면서 새 공법(貢法)의 시행과 전세 문제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였는데, 토지의 비옥함과 흉년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세금을 거둘 경우 백성에게 폐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견해를 함께 개진하였다. 이는 공이 단순히 관직을 거친 데 그치지 않고 당시 국가의 중요한 조세제도 논의에도 참여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인 1433년에는 좌사간(左司諫)에 임명되어 대간의 직책을 맡았다. 좌사간으로서 대사헌 신개(申槪) 등과 함께 조정의 인사와 정치 문제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양녕대군 문제 등에 대해서도 사간원 관원들과 뜻을 함께하여 간쟁하였다. 이듬해인 1434년에는 형조우참의(刑曹右參議)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다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제수되어 중앙의 당상관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이후에도 형조참의 등의 관직을 지내며 세종조의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가승에는 공이 여러 내외직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확인되는 『조선왕조실록』의 임명 기록에서는 형조참의·좌사간·첨지중추원사 등의 관직이 명확히 확인되므로 황해도관찰사 경력은 가승의 기록으로 함께 전하는 것이 신중하다. 공에게는 처눌(處訥)과 지눌(止訥) 두 아들이 있었다고 전하며, 처눌은 맹산현감을 지냈다. (나무위키) 묘는 부친의 묘 아래 자좌(子坐)에 있다고 전한다. 공은 고려 말 명문가의 문맥을 이어 조선 개국 직후 문과에 급제하고, 태조·태종·세종의 여러 조정을 거치면서 사간원의 언관과 형조의 당상관을 역임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서 흥해배씨 직제학공계의 기반을 이어간 인물이다.
가승: 배경분(裵景分)〔검교장군〕 → 배광우(裵光祐)〔위위승동정〕 → 배약경(裵若卿)〔위위승동정〕 → 배유손(裵裕孫)〔좌우위보승별장〕 →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 배전(裵詮)〔흥해군〕 → 배상도(裵尙度)〔중현대부·보문각직제학〕 → 배둔(裵屯)〔문과·형조참의〕 → 배처눌(裵處訥) · 배지눌(裵止訥)
파조 派祖 지평공 持平公
배권 裵權
성명: 배권(裵權)
자: 미상
호: 미상. 후손들은 관직에 따라 지평공(持平公)이라 칭하며, 흥해배씨 지평공파(持平公派)의 파조이다.
생몰: 1376년(우왕 2, 홍무 병진) ~ 몰년 미상 6월 25일
부: 배상지(裵尙志, 1351~1413). 호 백죽당(栢竹堂). 고려 통훈대부 판사복시사,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모: 영가군부인 권씨(永嘉郡夫人 權氏)
조부: 배전(裵詮·裵佺). 삼중대광 도첨의평리, 흥해군(興海君).
외조부: 권희정(權希正).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냈으며 후대 기록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라 전한다.
배: 공인 영가권씨(恭人 永嘉權氏). 공과 **합폄(合窆)**하였다.
장인: 미상
형제: 배환(裵桓)·배남(裵楠)·배강(裵杠)·배주(裵柱). 누이 1인은 **이승직(李繩直)**에게 출가하였다. 후대에는 형제 가운데 네 사람이 모두 문학으로 이름을 떨쳐 ‘배문(裵文)의 칭호’가 있었다고 전한다.
자녀: 아들 배효장(裵孝長)·배효신(裵孝信)·배효성(裵孝誠). 딸 1인은 안동권씨 **권개(權玠)**에게 출가하였다. 효장은 가각고녹사(架閣庫錄事), 효신은 문과에 올라 전서(典書), 효성은 문과에 올라 사헌부지평·공조정랑·은진현감 등을 지냈다.
관직: 생원(生員). 세종 원년인 1419년 음사(蔭仕)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나아가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이후 전농판관(典農判官), 횡성현감(橫城縣監), 봉화현감(奉化縣監) 등을 역임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승진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이르렀다. 『세종실록』에서는 1425년 경기도사(京畿都事)로 임명되어 세종에게 직접 백성의 구휼 문제를 아뢴 사실과, 이에 앞서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 1427년에는 사헌부지평 배권으로서 대간의 직임을 맡아 양녕대군 문제 등에 간쟁한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
작품: 현전하는 개인 문집이나 저술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형제들이 모두 문학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고 전하며, 공 역시 문학으로 이름난 가학의 전통을 계승한 인물로 기록된다.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촌 동쪽 무지(武地), 자좌(子坐). 배위 공인 영가권씨와 합폄하였다. 묘표는 7대손 배용길(裵龍吉)이 지었다.
시호: 미상
공의 휘는 권(權)이며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1376년 병진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고려 말 판사복시사를 지내고 왕조가 바뀐 뒤 안동 금계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킨 백죽당 배상지(裵尙志)이며, 조부는 고려 충혜왕 때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흥해군에 봉해진 배전(裵詮)이다. 모친은 영가군부인 권씨이며 외조부는 감찰규정을 지낸 권희정(權希正)이다. 공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뒤 새로운 왕조에 출사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세종 원년인 1419년 음사로 사헌부감찰에 제수된 뒤 호조좌랑 등 중앙의 청요직을 거쳤다. 이어 전농판관과 횡성·봉화 두 고을의 현감을 역임하며 중앙과 지방의 행정을 두루 경험하였다. 세종 7년인 1425년에는 경기도사로 재직하였다. 이때 세종이 흉년으로 인한 경기 지역의 백성 구휼 문제를 묻자 공은 자신이 호조정랑으로 재직할 당시 경기의 손실 상황을 살펴 이미 농사가 부실함을 알고 걱정하고 있었다고 직접 아뢰었다. 세종은 공을 비롯한 지방관들에게 백성의 생업을 보전하도록 힘쓰고 정상적인 공물 이외의 잡역을 덜어 주도록 명하였다. 이는 공이 단순히 관직을 지낸 것에 그치지 않고 국가 재정과 민생 행정에 직접 참여한 관료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이듬해인 1426년에도 경기 도사로 왕의 강무 행차를 맞이한 사실이 실록에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 이후 공은 대관인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세종 9년인 1427년, 양녕대군을 다시 불러 접견하는 문제를 놓고 사헌부와 사간원이 연명하여 간쟁하였을 때 공은 지평으로서 정언 성자량 등과 함께 임금 앞에 나아가 태종의 훈계를 따를 것을 강하게 아뢰었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해 사헌부와 승정원 사이의 절차 문제에서도 지평 배권의 이름이 직접 나타나니, 당시 공이 언론과 감찰을 담당하는 대간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뒤에 형조정랑에 이르러 형률과 사법 행정에 참여하였다. 공의 형제인 환·남·강 등도 문학과 관직으로 이름을 나타내어 당시에는 형제들이 함께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고 전한다. 이러한 가풍은 부친 백죽당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이어받은 학맥과도 연결된다. 공의 배위는 공인 영가권씨이며 공과 합장하였다. 슬하에 효장·효신·효성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장남 효장은 가각고녹사에 나아갔고, 차남 효신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서를 지냈으며, 삼남 효성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공조정랑을 지내고 은진현감에 이르렀다. 이처럼 자손들 또한 문과와 관직으로 이어져 공의 문학과 관료 가풍을 계승하였다. 공의 몰년은 전하지 않으나 기일은 6월 25일로 전한다. 묘는 안동 서후 금계촌 동쪽 무지의 자좌에 자리하며 배위 영가권씨와 합폄하였다. 후일 7대손 배용길이 묘표를 지어 공의 행적을 후세에 전하였다. 공은 고려의 유신인 백죽당의 장남으로 태어나 조선 초기 관료사회에 진출하여 감찰·지방관·대간·형조의 관직을 두루 거친 문신이며, 특히 사헌부지평으로서 왕에게 직언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후손들은 공의 대표 관직을 따라 **지평공(持平公)**이라 칭하고 공을 지평공파의 파조로 받들어 왔다.
가승: 배경분(裵景分)〔검교장군〕 → 배광우(裵光祐)〔위위승동정〕 → 배약경(裵若卿)〔위위승동정〕 → 배유손(裵裕孫)〔좌우위보승별장〕 →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 배전(裵詮)〔흥해군〕 → 배상지(裵尙志)〔백죽당·판사복시사〕 → 배권(裵權)〔사헌부지평·지평공파 파조〕 → 배효장(裵孝長) · 배효신(裵孝信) · 배효성(裵孝誠) / 녀 → 권개(權玠)
파조 派祖 관찰사공 觀察使公
배환 裵桓
성명: 배환(裵桓)
자: 미상
호: 미상
생몰: 1379년(우왕 5, 기미) ~ 1448년(세종 30). 일부 인물사전에는 출생년을 1378년으로 적고 있으나, 세종 30년(1448)에 나이 70세였다는 실록 기록과 기미년생이라는 전승을 따르면 1379년생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 배상지(裵尙志, 1351~1413). 호 백죽당(栢竹堂). 고려 통훈대부 판사복시사,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모: 영가군부인 안동권씨(永嘉郡夫人 安東權氏)
조부: 배전(裵詮·裵佺). 삼중대광 도첨의평리, 흥해군(興海君).
외조부: 권희정(權希正). 감찰규정(監察糾正). 후대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라 전한다.
배: 정부인 함창김씨(貞夫人 咸昌金氏)
장인: 김취용(金就用)으로 전한다. 일부 자료에는 김정용(金貞用)으로도 기록되어 이명 또는 판독 차이에 대한 추가 고증이 필요하다. 배환의 아들 배효숭의 문과자료에서는 외조부를 함창인 김취용으로 전한다. (인공지능 음성지원 ai 인터넷족보 제작 족보나라)
형제: 형 배권(裵權), 아우 배남(裵楠)·배강(裵杠)·배주(裵柱). 누이 1인은 **이승직(李繩直)**에게 출가하였다. 배권·배환·배남·배강은 문학으로 이름이 있어 후세에 영양남씨 형제들의 무재와 대비하여 ‘배문남무(裵文南武)’라 일컬어졌다고 전한다.
자녀: 배효종(裵孝從)·배효존(裵孝存)·배효숭(裵孝崇)·배효건(裵孝騫)·배효사(裵孝思) 등 5남 4녀. 장남 효종은 사헌부감찰, 효존은 동부녹사, 효숭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집의·좌사간·부승지·여흥부사, 효건은 옥과현감·남원진관병마절제도위, 효사는 언양현감을 지냈다. 네 사위는 **문여량(文汝良)·윤처공(尹處恭)·최정(崔汀)·박온(朴溫)**으로 전한다.
관직: 1401년(태종 1) 신사 증광문과 병과 6위 급제. 전력은 생원(生員). 이후 호군(護軍)·의주삭주도경차관(義州朔州道敬差官)·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좌사간·우사간·병조참의·공조참의·형조참의·첨지중추원사 등을 지냈으며, 황해도·충청도·전라도의 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판진주목사(判晉州牧事)**에 임명되었다. 1401년 증광문과에서 배환은 병과 6위로 확인된다. (DH Aks)
작품: 시집이 있었으나 대부분 유실되었다. 후대 기록에 「침벽루차운(枕碧樓次韻)」 한 수가 전하며, 『월성지(月城誌)』에도 배환의 시 한 수가 전한다.
묘소: 안동 풍산현 북쪽 본직산(本稷山). 옛 기록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고 전한다. 현재 묘역은 안동시 풍산읍 일대로 전승된다. (경주이씨 월성군후 용재공파)
시호: 미상
공의 휘는 환(桓)이고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1379년 기미년, 고려 말 안동 금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고려 판사복시사를 지내고 고려가 망한 뒤 안동 금계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킨 백죽당 배상지(裵尙志)이며, 조부는 고려 충혜왕 때 공을 세워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진 배전(裵詮)이다. 모친은 영가군부인 안동권씨로 감찰규정 권희정의 딸이다. 공은 형제 가운데 둘째로, 형 권과 아우 남·강·주가 있었다. 공은 아우 배강과 함께 죽계 조용(趙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유학을 닦았다. 태종 원년인 1401년 신사 증광문과에 병과 6위로 급제하였다. 당시 전력은 생원이었다. (DH Aks) 이후 관직에 나아가 호군을 지냈고, 세종 5년인 1423년에는 의주·삭주도에 파견되는 경차관으로 임명되어 북방의 진휼과 지방 행정을 살폈다. 당시 실록에는 호군 배환이 평양·안주 방면 경차관으로 출발한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초기에는 도성 수축을 비롯한 국가의 주요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세종 4년에는 도성수축도감의 부사(副使)로서 도성 수축 문제를 태상왕에게 아뢰는 임무를 맡았다. (조선왕조실록) 이후 예문관의 문신으로 성장하여 예문관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선위사를 겸하여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외교 임무도 수행하였다. 세종 16년인 1434년 우사간(右司諫)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좌사간으로서 사헌부와 함께 조정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7년인 1435년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공조참의와 형조참의 등 육조의 주요 당상관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공은 중앙 관직뿐 아니라 지방 행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황해도·충청도·전라도의 세 도 관찰사를 역임하여 후손들이 공을 삼도관찰사라 일컬었다. 특히 1442년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전라도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공이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백성의 생활과 질병 문제를 살피고 지방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힘썼다는 전승이 후대에 이어졌다. 중앙에서는 다시 첨지중추원사와 공조·형조참의 등을 역임하면서 세종조의 중견 문신으로 활동하였다. 세종 28년인 1446년 판진주목사(判晉州牧事)에 제수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인 1448년, 공의 나이가 일흔에 이르자 법례에 따라 치사하여야 하였으나 세종은 공을 특별히 유임시켰다. 공은 왕의 특별한 은전에 감사하는 전문을 올렸다. 이 기록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이 조정으로부터 행정 능력과 경륜을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천군민센터) 공은 문학에도 뛰어나 시집을 남겼으나 대부분 유실되었다. 전하는 유문 가운데 「침벽루차운」 등이 있으며 후대 읍지에도 공의 시가 수록되었다. 공의 배위는 정부인 함창김씨이며, 슬하에 효종·효존·효숭·효건·효사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아들들 또한 관직에 나아가 가문의 문풍을 계승하였으며, 특히 효숭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승지·여흥부사 등에 오르고 원종공신에 녹권되어 가문을 크게 빛냈다. 공은 1448년에 졸한 것으로 전하며, 묘는 옛 풍산현 북쪽 본직산에 있다. 옛 읍지에는 공의 묘와 함께 신도비가 남아 있다고 기록하였다. (경주이씨 월성군후 용재공파) 공이 세상을 떠난 뒤 후손들은 그의 학문과 관직생활을 기리기 위하여 낙동강 절벽 위에 낙암정(洛巖亭)을 세웠다. 현재 국가유산 안내에서는 낙암정을 1451년 흥해배씨 후손들이 배환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 설명하고 있다. (문화유산청) 공은 태종 초 문과에 급제한 뒤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지내고, 황해·충청·전라 삼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특히 언관으로서는 임금에게 직언하고, 관찰사로서는 여러 도의 민정을 살피며, 말년까지 판진주목사로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이에 후손들은 공의 대표적인 관직을 따라 관찰사공(觀察使公)이라 칭하고, 공을 흥해배씨 관찰사공파의 파조로 받들어 왔다.
가승: 배경분(裵景分)〔검교장군〕 → 배광우(裵光祐)〔위위승동정〕 → 배약경(裵若卿)〔위위승동정〕 → 배유손(裵裕孫)〔좌우위보승별장〕 →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 배전(裵詮)〔흥해군〕 → 배상지(裵尙志)〔백죽당·판사복시사〕 → 배환(裵桓)〔삼도관찰사·관찰사공파 파조〕 → 배효종(裵孝從) · 배효존(裵孝存) · 배효숭(裵孝崇) · 배효건(裵孝騫) · 배효사(裵孝思) / 녀 → 문여량(文汝良) · 윤처공(尹處恭) · 최정(崔汀) · 박온(朴溫)
파조 派祖 감찰공 監察公
배남 裵南
성명: 배남(裵楠)
자: 미상
호: 미상
생몰: 1384년(우왕 10) ~ 몰년 미상. 안동 지역자료에서도 배남을 1384년생으로 기록한다. (안동시청)
부: 배상지(裵尙志, 1351~1413). 호 백죽당(栢竹堂). 고려 통훈대부 판사복시사,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모: 영가군부인 안동권씨(永嘉郡夫人 安東權氏)
조부: 배전(裵詮·裵佺). 삼중대광 도첨의평리, 흥해군(興海君).
외조부: 권희정(權希正). 감찰규정(監察糾正).
배: 숙인 영양남씨(淑人 英陽南氏)
장인: 남민생(南敏生, 1348~1407). 영양남씨. 공조참의, 증 이조참판으로 전한다. 남민생의 딸이 배남에게 출가하였음은 영양남씨 문중자료에서도 확인된다. (pyeonaek.ugyo.net)
형제: 형 배권(裵權)·배환(裵桓), 아우 배강(裵杠)·배주(裵柱). 누이 1인은 **이승직(李繩直)**에게 출가하였다. 『국조문과방목』에서도 배권·배환·배강과의 형제관계가 확인된다.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자녀: 아들 배효노(裵孝老)·배효눌(裵孝訥). 효노는 진용교위 부사직(進勇校尉副司直), 효눌은 **선교랑 통례문통찬(宣敎郞通禮門通贊)**을 지냈다. 딸 3인은 각각 **이허(李栩)·진숭조(秦崇祖)·김미(金湄)**에게 출가하였다.
관직: 전력 생원(生員). 1411년(태종 11) 신묘 식년시 문과 동진사 12위 급제.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봉상주부(奉常注簿)·경상우도 경차관(慶尙右道敬差官)·통훈대부 사헌부감찰(通訓大夫司憲府監察)·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문과방목에는 사헌부감찰이 확인되고, 1422년 『세종실록』에는 봉상주부 배남이 경상우도 경차관으로 파견된 사실이 직접 기록되어 있다.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작품: 현전하는 개인 문집이나 저술은 확인되지 않는다. 1411년 문과의 시제는 책문(策問) 「치도본말(治道本末)」이었다.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묘소: 안동 와룡면 가수천(佳水川), 부친 백죽당 배상지 묘의 동쪽 기슭 청룡등(靑龍嶝), 자좌(子坐). 배위 **숙인 영양남씨와 합폄(合窆)**하였다. 『영가지』에도 감찰 배남의 묘가 안동부 북쪽, 부친 배상지 묘의 동쪽 기슭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이씨 월성군후 용재공파)
시호: 미상
공의 휘는 남(楠)이며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1384년 고려 우왕 10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고려에서 통훈대부 판사복시사를 지내고 왕조가 바뀐 뒤 안동 금계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킨 백죽당 배상지(裵尙志)이며, 조부는 고려 충혜왕 때 공을 세워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진 배전(裵詮)이다. 모친은 영가군부인 안동권씨이며 외조부는 감찰규정 권희정이다. 공은 백죽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형 권·환과 아우 강·주와 함께 가학을 계승하였다. 형제 가운데 권은 사헌부지평, 환은 삼도관찰사, 공은 사헌부감찰, 강은 이조정랑을 지내어 여러 형제가 함께 문학과 관직으로 이름을 나타냈다. 후세에는 이들 형제의 문학을 영양남씨 일문의 무재와 견주어 ‘배문남무(裵文南武)’, 곧 ‘배씨는 문(文), 남씨는 무(武)’라는 칭호가 있었다고 전한다. (경주이씨 월성군후 용재공파) 공은 먼저 생원이 되었으며, 1411년 태종 11년 신묘 식년시 문과에서 동진사 12위, 전체 33인 가운데 22위로 급제하였다. 당시 문과에서 공에게 주어진 책문의 주제는 「치도본말(治道本末)」, 즉 나라를 다스리는 도의 근본과 말단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문과 급제 뒤에는 성균관학유가 되어 성균관에서 유생의 교육과 학사 업무에 참여하였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감찰에 올랐다. 사헌부감찰은 관리의 비위와 조정의 기강을 살피는 대관의 직책으로, 공은 조선 초기의 언론·감찰 관료로 활동하였다. 1422년 세종 4년에는 공이 봉상주부(奉常注簿)로 재직하고 있었음이 『세종실록』에 직접 나타난다. 그해 여러 지방에 큰 기근이 들자 세종은 각 도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백성을 구휼하게 하였는데, 공에게 경상우도 경차관의 임무를 맡겼다. 공은 해당 지역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수령들이 백성을 제대로 돌보았는지를 조사하며, 귀환한 뒤 도내의 기민 수를 왕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받았다. 이는 공이 중앙의 문신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 진휼정책과 지방행정 감독을 직접 담당한 사실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이후 공은 통훈대부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이조정랑은 관리의 인사행정을 담당한 이조의 핵심 관직으로, 후대에도 공은 이 관직과 사헌부감찰의 명칭으로 널리 전해졌다. 공의 배위는 숙인 영양남씨이며, 장인은 영양남씨의 인물 남민생(南敏生)이다. 남민생의 집안 또한 안동의 유력한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영양남씨 계보에서도 그의 딸이 정랑 배남에게 출가하였다고 기록한다. (pyeonaek.ugyo.net) 공에게는 아들 효노와 효눌이 있었다. 장남 효노는 진용교위 부사직을 지냈고, 차남 효눌은 선교랑 통례문통찬을 지내면서 가문의 관료 전통을 이어갔다. 또한 세 딸을 두어 각각 이허·진숭조·김미에게 출가시켰다. 공의 몰년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묘는 안동 와룡 가수천의 부친 백죽당 묘 동쪽 기슭에 자리하며, 배위 숙인 영양남씨와 합폄하였다. 옛 『영가지』에서도 이곳을 ‘감찰 배남의 묘’라 별도로 기록하여 공의 묘소가 일찍부터 안동 지역에서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이씨 월성군후 용재공파) 공은 조선 개국기에 고려 유신의 집안에서 태어나 새 왕조의 문과에 급제하고 교육·감찰·인사·진휼 행정의 여러 직책을 두루 담당한 문신이었다. 특히 1422년 기근 때 경상우도에 파견되어 백성을 구휼한 행적은 공의 실제 관료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후손들은 공의 대표 관직인 사헌부감찰에 따라 공을 감찰공(監察公)이라 칭하고, 공을 흥해배씨 감찰공파(監察公派)의 파조로 받들어 왔다.
가승: 배경분(裵景分)〔검교장군〕 → 배광우(裵光祐)〔위위승동정〕 → 배약경(裵若卿)〔위위승동정〕 → 배유손(裵裕孫)〔좌우위보승별장〕 →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 배전(裵詮)〔흥해군〕 → 배상지(裵尙志)〔백죽당·판사복시사〕 → 배남(裵楠)〔문과·사헌부감찰·이조정랑·감찰공파 파조〕 → 배효노(裵孝老) · 배효눌(裵孝訥) / 녀 → 이허(李栩) · 진숭조(秦崇祖) · 김미(金湄)
파조 派祖 정랑공 正郞公
배강 裵杠
성명: 배강(裵杠). 초명은 **강(絳)**으로 전한다.
자: 미상
호: 미상
생몰: 생몰년 미상. 세종대인 1419년부터 1438년까지의 관직 활동이 확인된다.
부: 배상지(裵尙志, 1351~1413). 호 백죽당(栢竹堂). 고려 통훈대부 판사복시사,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모: 영가군부인 안동권씨(永嘉郡夫人 安東權氏)
조부: 배전(裵詮·裵佺). 삼중대광 도첨의평리, 흥해군(興海君).
외조부: 권희정(權希正).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냈다.
배: 숙인 일직손씨(淑人 一直孫氏)
장인: 손약(孫禴). **감무(監務)**를 지냈다.
형제: 형 배권(裵權)·배환(裵桓)·배남(裵楠), 아우 배주(裵柱). 누이 1인은 이승직(李繩直)에게 출가하였다. 특히 중형 배환과 함께 문정공 조용(趙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용 문인 명단에도 배환과 배강의 이름이 함께 전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녀: 2남 2녀. 아들은 **배승원(裵承源)·배효진(裵孝進)이며, 두 딸은 각각 최연(崔淵)·권자겸(權自謙)**에게 출가하였다.
관직: 1419년 성균 생원, 1426년(세종 8) 병오 식년문과 동진사 5위 급제. 성균관직학(成均館直學)·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이조좌랑(吏曹佐郞)·이조정랑(吏曹正郞)·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최종적으로 통훈대부 이조정랑으로 전한다. 1426년 문과 급제 사실과 흥해 본관은 방목자료에서도 확인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품: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전한다〔有詩集〕.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임천에 거처하며 많은 글을 지었다는 전승이 있으나, 현재 독립된 문집의 전모는 확인하기 어렵다.
묘소: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독양리 독죽에 배위 숙인 일직손씨와 합장한 것으로 전한다. 본래 묘는 **안동 금계촌 작장동(勺將洞)**에 있었으나 뒤에 실전되었다가 찾아 이장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옛 『영가지』에도 정랑 배강의 묘가 하금지 작장동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좌향은 전승자료 사이에 차이가 있어 단정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예천군민센터)
시호: 미상
공의 휘는 강(杠)이며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초명은 강(絳)으로 전한다. 부친은 고려에서 판사복시사를 지내고 고려가 망한 뒤 안동 금계에 은거한 백죽당 배상지(裵尙志)이며, 조부는 고려 충혜왕 때 공을 세워 흥해군에 봉해진 배전(裵詮)이다. 모친은 영가군부인 안동권씨로 감찰규정 권희정의 딸이다. 공은 백죽당의 넷째 아들로, 형 권·환·남과 아우 주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았으며 특히 중형 배환과 함께 문정공 조용(趙庸)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조용은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한 고려 말·조선 초의 유학자로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후대의 문인록에도 배환과 배강이 나란히 조용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공은 먼저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았으며, 1426년 세종 8년 병오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당시 방목에는 공의 본관을 흥해라 하고 동진사 5위로 기록하였다. (DH Aks) 문과 급제 후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직임을 맡아 성균관직학에 올랐다. 1428년 세종 10년, 주자소 관원으로서 『강목통감(綱目通鑑)』의 인쇄를 담당하던 중 책에 오류가 많이 발견되자 교서 저작랑 장돈의와 함께 의금부에 갇히는 일을 겪었다. 이는 공이 당시 국가의 중요한 서적 간행과 교육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승정원주서로 왕명을 출납하고 국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였다. 1431년 세종 13년 왕이 포천으로 행차하던 중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군사와 말이 쓰러지자, 공은 주서로서 왕명을 받고 술과 음식을 가지고 길을 따라 다니며 사람과 말을 구호하였다. 실록은 이 구휼로 많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기록한다. (조선왕조실록) 이후 공은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 들어가 이조좌랑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세종 17년인 1435년에는 이조좌랑 배강의 이름이 실록에 직접 나타나며, 인사 문제와 관련한 탄핵을 받자 세종이 사건을 살피고 대신을 존중하는 뜻에서 더 문제 삼지 않도록 한 일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공은 이후 사간원으로 옮겨 우헌납(右獻納)이 되어 국왕의 잘못을 간하고 조정의 시폐를 논하는 언관의 책임을 맡았다. 1438년 세종 20년에는 지평 권자홍 등과 함께 양녕대군에 관한 대간의 교장을 국왕에게 반드시 아뢰어야 한다고 승정원에 강하게 요구하였다. 공은 이미 왕이 관련 상소를 올리지 말라고 명하였음에도 “신들의 청이 윤허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직 계달조차 되지 않았으니 억울함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을 밝히며 대간의 직분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해에도 사헌부·사간원의 관원들과 함께 조정의 여러 문제를 간쟁하였으니, 후세에 공을 기탄없이 바른말을 하여 시폐를 바로잡은 언관으로 평가한 것은 이러한 실록의 행적에 근거한다. 공은 학문과 문장에도 이름이 있었다. 선대에서부터 이어진 학문적 가풍을 계승하고 조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관직생활과 학문을 함께 하였으며, 시집이 있었다〔有詩集〕고 전한다. 배위는 숙인 일직손씨이며 감무 손약(孫禴)의 딸이다. 공에게는 승원과 효진 두 아들, 그리고 최연과 권자겸에게 출가한 두 딸이 있었다. 공의 묘는 처음 안동 금계촌 작장동에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뒤에 묘소가 실전되었다가 다시 찾아 예천 보문면 독양리 독죽으로 이장하여 배위 일직손씨와 합장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예천군민센터) 공은 조선 초기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의 교육과 국가 서적의 간행에 참여하고, 승정원에서 왕명을 출납했으며, 이조에서 인사를 담당하고 사간원에서는 왕에게 직언하였다. 특히 학문과 문장, 청렴한 관직생활과 직언·간쟁으로 이름을 남긴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후손들은 공이 통훈대부 이조정랑에 이른 것을 따라 정랑공(正郞公)이라 칭하고, 공을 흥해배씨 정랑공파(正郞公派)의 파조로 받들어 왔다.
가승: 배경분(裵景分)〔검교장군〕 → 배광우(裵光祐)〔위위승동정〕 → 배약경(裵若卿)〔위위승동정〕 → 배유손(裵裕孫)〔좌우위보승별장〕 →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 배전(裵詮)〔흥해군〕 → 배상지(裵尙志)〔백죽당·판사복시사〕 → 배강(裵杠)〔문과·이조정랑·사간원헌납·정랑공파 파조〕 → 배승원(裵承源) · 배효진(裵孝進) / 녀 → 최연(崔淵) · 권자겸(權自謙)
정랑공 正郞公
배소 裵素
성명: 배소(裵素)
자: 미상
호: 미상
생몰: 생몰년 미상. 조선 태종~세종대 활동.
부: 배상공(裵尙恭). 고려 공민왕조 문과에 올라 **가선대부 공조전서(嘉善大夫 工曹典書)**를 지냈다.
모: 정부인 영가김씨(貞夫人 永嘉金氏)
조부: 배전(裵詮·裵佺). 삼중대광 도첨의평리, 흥해군(興海君).
외조부: 김성옥(金成玉). **부정(副正)**을 지냈다.
배: 영가군부인 안동권씨(永嘉郡夫人 安東權氏)
장인: 권진(權軫, 1357~1435). 본관 안동, 호 독수와(獨樹窩). 고려 우왕 3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형조판서·호조판서·이조판서·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배소가 권진의 사위였음은 『국조문과방목』에서도 확인된다.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형제: 확인되는 형제 없음. 배상공의 자녀 가운데 현재 확인되는 아들은 배소이다.
자녀: 아들 배계종(裵繼宗). 계종은 음사로 출사하여 **현감(縣監)**을 지내고 여러 외직을 역임하였으며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이름이 있었다〔以廉謹稱〕**고 전한다. 딸 4인은 각각 **권옹(權雍)·홍익부(洪益敷)·남륙(南陸)·안종생(安從生)**에게 출가하였다. 이 가운데 안종생에게 출가한 딸은 후일 대사간에 이른 **안팽명(安彭命)**의 모친으로도 확인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직: 전력 생원(生員). 1408년(태종 8) 무자 식년시 문과 동진사 15위 급제. 사재감주부(司宰監注簿)·경상도 양잠채방판관(養蠶採訪判官)·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이조좌랑(吏曹佐郞)·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 등을 거쳐 **통훈대부 이조정랑(通訓大夫 吏曹正郞)**에 이르렀다. 방목에는 본관 흥해, 부 배상공, 조부 배전, 처부 권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작품: 현전하는 개인 문집이나 저술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문행이 있고 풍도가 준정하여 세상에서 매가 조정에 우뚝 선 것 같다고 칭하였다〔有文行 風度峻整 世稱鶚立朝端〕”고 전하여, 문장과 행실 및 엄정한 관료적 풍모로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묘소: **안동 풍산 일대의 선고 배상공 묘와 같은 묘역〔考位同原〕**에 있으며 **표석(表石)이 있었다〔有表石〕**고 전한다. 배위 영가군부인 권씨의 묘는 **공의 묘 오른쪽 기슭〔乾位右麓〕**에 자리하고 역시 표석이 있었다고 전한다.
시호: 미상
공의 휘는 소(素)이며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부친은 고려 공민왕조 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 공조전서에 이른 배상공(裵尙恭)이고, 조부는 충혜왕 때 공을 세워 흥해군에 봉해진 배전(裵詮)이다. 모친은 정부인 영가김씨로 부정 김성옥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아 먼저 생원이 되었고, 1408년 태종 8년 무자 식년문과에 동진사 15위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당시 문과 급제자 자료에는 공의 본관을 흥해로, 부친을 배상공, 조부를 배전, 장인을 권진으로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17년 사재감주부가 되었고, 경상도 의성의 잠소에 파견되어 국가의 양잠 정책을 수행하였으며 뒤에는 경상도 양잠채방판관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종 4년인 1422년에는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에 제수되었다. 정언은 국왕에게 직언하고 조정의 잘못을 논하는 언관으로, 공이 일찍부터 문신 가운데 언론의 직책을 맡았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이후 이조에 들어가 이조좌랑을 지냈다. 세종 7년인 1425년, 이조판서 허조가 관리들의 자급 승진이 지나치게 지체되고 있음을 세종에게 아뢰면서 이조좌랑 배소가 승의랑의 자급에 머문 지 이미 7년이나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세종은 이와 같은 경우 다음 관직으로 옮길 때 자급을 뛰어올려 주도록 하였으니, 공이 당시 이조의 인사 실무를 장기간 담당한 관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이어 강원도도사에 임명되어 지방의 행정과 감찰을 담당하였다. 다만 강원도도사로 재직하던 때 명나라에 진헌할 송골매의 포획 업무를 충실히 감독하지 못한 일이 문제가 되어, 1426년 말 의금부의 국문 대상이 되었고 이듬해 장형을 받은 기록도 실록에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 그 뒤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마침내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이조정랑은 조선시대 문관의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의 핵심 낭관으로, 공의 관료생활에서 대표적인 관직이다. 공은 문학과 행실에도 이름이 있었으며, 후대에는 “문행이 있고 풍도가 준정하여 매가 조정에 우뚝 선 것과 같았다〔鶚立朝端〕”는 평가가 전한다. 이는 공이 단정하고 엄정한 풍모와 문신다운 품격으로 조정에서 평가받았음을 뜻한다. 공의 배위는 영가군부인 안동권씨이며, 장인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명신으로 우의정을 지낸 문경공 권진(權軫)이다. 권진은 청렴과 강직으로 이름난 인물로 세종조 정승에 이르렀으니, 공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 명문 관료가문과 혼인으로 연결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에게는 아들 계종(繼宗)과 네 딸이 있었다. 계종은 음사로 현감에 나아가 여러 외직을 역임하며 청렴과 근신으로 이름을 얻어 가문의 관료 전통을 이었다. 네 딸은 권옹·홍익부·남륙·안종생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안종생에게 출가한 딸의 아들 안팽명은 훗날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에 이르는 등 외손 또한 현달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의 생몰년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묘는 부친 배상공의 묘와 같은 묘역에 자리하고 표석이 있었으며, 배위 권씨의 묘 또한 공의 묘 오른쪽 기슭에 있다고 전한다. 공은 태종조 문과에 급제한 뒤 태종과 세종 양대에 걸쳐 사재감·사간원·이조와 지방관직을 두루 거쳐 이조정랑에 이른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특히 문행과 준정한 풍도로 이름을 얻어 “악립조단(鶚立朝端)”, 곧 매가 조정에 늠름하게 서 있는 것과 같다는 칭송을 받은 인물로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한다.
가승: 배경분(裵景分)〔검교장군〕 → 배광우(裵光祐)〔위위승동정〕 → 배약경(裵若卿)〔위위승동정〕 → 배유손(裵裕孫)〔좌우위보승별장〕 →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 배전(裵詮)〔흥해군〕 → 배상공(裵尙恭)〔공조전서〕 → 배소(裵素)〔1408년 문과·이조정랑〕 → 배계종(裵繼宗)〔현감〕 / 녀 → 권옹(權雍) · 홍익부(洪益敷) · 남륙(南陸) · 안종생(安從生)
참판공 參判公
배천석 裵天錫
성명: 배천석(裵天錫)
자: 경수(景受)
호: 미상
생몰: 1511년(중종 6, 신미) ~ 1573년(선조 6, 계유) 1월 5일
부: 배헌(裵巚). 자 헌지(巚之). 중종조 생원. 후일 손자 배삼익의 현달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모: 증 숙부인 금성박씨(贈淑夫人 錦城朴氏)
조부: 배이순(裵以純). 자 자강(自強). 성종조 진사. 후일 증손 배삼익의 현달로 통훈대부 통례원좌통례에 추증되었다.
외조부: 박자(朴磁). **사맹(司猛)**을 지냈다.
배: 증 정부인 영일정씨(贈貞夫人 迎日鄭氏). 공과 **합폄(合窆)**하였다.
장인: 정세호(鄭世豪). 처사(處士).
형제: 아우 배천우(裵天佑)·배천주(裵天柱). 여형제 3인은 각각 **금응균(琴應均)·권적(權頔)·금우인(琴友仁)**에게 출가하였다.
자녀: 아들 배삼익(裵三益, 1534~1588)·배삼근(裵三近). 딸 3인은 각각 이응조(李應祚)·이적(李寂)·금응남(琴應南)에게 출가하였다. 장남 배삼익은 자 여우(汝友), 호 임연재(臨淵齋)로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차남 배삼근은 자 여용(汝勇), 호 유산(儒山)으로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지냈다.
관직: 1543년(중종 38) 충재 권벌(權橃)의 천거로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에 임용되었다. 1546년(명종 1) 선교랑(宣敎郞)·병절교위(秉節校尉)·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에 올랐다. 후일 아들 배삼익의 현달로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작품: 별도의 문집이나 현전 저술은 확인되지 않는다. 공의 행적은 아들 **배삼익이 지은 묘지명(墓誌銘)**과 백담 구봉령(具鳳齡)이 지은 묘갈명(墓碣銘) 등에 전한다.
묘소: 호애산(虎崖山), 선고 배헌의 묘 뒤에 있다. 배위 증 정부인 영일정씨와 합폄하였다. 아들 배삼익이 묘지명을 짓고, 백담 구봉령이 묘갈명을 지었다.
시호: 없음. 사후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贈嘉善大夫兵曹參判).
공의 휘는 천석(天錫)이고 자는 경수(景受)이며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1511년 중종 6년 신미년에 태어났다. 부친은 생원 배헌(裵巚)이고 조부는 진사 배이순(裵以純)이며, 모친은 증 숙부인 금성박씨로 사맹 박자(朴磁)의 딸이다. 공의 집안은 고려 말 백죽당 배상지(裵尙志)가 안동에 정착한 이래 금계와 내성 일대에 세거하며 학문과 관직의 전통을 이어온 가문이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행실을 닦았으며, 1543년 충재 권벌(權橃)의 천거를 받아 조정에 나아가 의서습독관에 임명되었다. 의서습독관은 의학에 관계된 전문 서적을 익히고 관련 학문을 연구하도록 설치한 관직으로, 공이 학문과 실용적인 의학 지식에도 일정한 소양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1546년 선교랑·병절교위·충좌위부사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공은 관직의 영달만을 좇지 않고 집안의 어른을 봉양하는 일을 중히 여겨 조정의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왔다. 특히 조모와 모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였다고 전하니, 후대에는 이를 공의 효행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적으로 기록하였다. 공은 1552년 임자년 내성에서 선대의 금계 옛 터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1558년 무오년에는 임하현 북쪽 도목촌(桃木村)에 터를 잡아 거주하였다. 이 무렵 후대 임연재종택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생활 기반도 마련되었다. 공은 이후 도목에서 안동 송천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도 전한다. 배위는 증 정부인 영일정씨로 처사 정세호의 딸이다. 장인은 정세호이며, 정씨의 선대에는 사용 정승윤과 호군 정맹아 등이 있었다. 공과 정씨 사이에는 삼익·삼근 두 아들과 세 딸이 있었다. 장남 배삼익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564년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의 여러 관직을 거쳐 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에 올라 흥해배씨 가문의 문명을 크게 드러냈다. 차남 배삼근 또한 일찍이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뒤에 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벼슬보다 은덕을 지키며 살아 유산(儒山)이라 불렸다. 공은 두 아들에게 학문과 행실을 중히 하는 가풍을 전하였고, 특히 장남 배삼익과 그 후손들에게 이어진 학문적 전통은 이후 금역당 배용길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1573년 선조 6년 계유년 정월 5일 공이 졸하였다. 묘는 호애산의 선고 묘 뒤에 마련하였고 배위 영일정씨와 합폄하였다. 아들 배삼익이 친히 부친의 묘지명을 지어 생전의 행적을 기록하였으며, 당대의 학자 백담 구봉령이 묘갈명을 지어 공의 덕행을 후세에 전하였다. 뒤에 아들 배삼익이 크게 현달하자 공은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부친 배헌과 조부 배이순에게도 각각 추은이 미쳤다. 공은 높은 관직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라기보다 권벌의 천거를 받을 만큼 학행을 인정받고, 관직에 나아간 뒤에도 부모와 집안을 돌보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온 조선 중기의 사족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안동에서 가문의 세거 기반을 정비하고 임연재 배삼익을 비롯한 후손들에게 학문과 효행의 가풍을 전하여, 이후 흥해배씨 지평공계가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가승: 배경분(裵景分)〔검교장군〕 → 배광우(裵光祐)〔위위승동정〕 → 배약경(裵若卿)〔위위승동정〕 → 배유손(裵裕孫)〔좌우위보승별장〕 → 배영지(裵榮至, 구휘 仁儉)〔전리판서·평양윤·상호군〕 → 배전(裵詮)〔흥해군〕 → 배상지(裵尙志)〔백죽당·판사복시사〕 → 배권(裵權)〔사헌부지평〕 → 배효장(裵孝長)〔가각고녹사〕 → 배임(裵袵)〔우군섭부사·사정 등〕 → 배이순(裵以純)〔진사·증 통례원좌통례〕 → 배헌(裵巚)〔생원·증 승정원좌승지〕 → 배천석(裵天錫)〔의서습독관·충좌위부사과·증 병조참판〕 → 배삼익(裵三益) · 배삼근(裵三近) / 녀 → 이응조(李應祚) · 이적(李寂) · 금응남(琴應南)
임연재공 臨淵齋公
배삼익 裵三益
유산공 儒山公
배삼근 裵三近
금역당공 琴易堂公
배용길 裵龍吉
의사공 義士公
배인길 裵寅吉
도장공 道藏公
배윤전 裵潤全
후간공 後澗公
배흥조 裵興祚
도와공 綯窩公
배면 裵冕
삼여당공 三餘堂公
배행검 裵行儉
첨정공 僉正公
배이도 裵爾度
괴담공 槐潭公
배상열 裵相說
수간공 守磵公
배선원 裵善源
조선 朝鮮 → 대한민국 大韓民國
백저공 白渚公
배동환 裵東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