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해배씨 개관
興海裵氏 槪觀
흥해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명칭
흥해배씨(興海裵氏)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일대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신라시대 퇴화군을 거쳐 의창군이라 불렸으며, 고려시대에 흥해군으로 개칭되었다. 동해와 곡강천을 끼고 넓은 평야가 형성된 지역으로, 예로부터 농업과 해산물 생산이 발달하였다. ‘곡강(曲江)’은 흥해와 관련하여 오래 사용되어 온 지명으로, 흥해배씨의 옛 족보와 문중 기록에서도 자주 확인된다.
흥해배씨의 기원
흥해배씨(興海裵氏)는 고려시대의 인물인 배경분(裵景分)을 일세조로 하여 계보를 이어 온 배씨의 한 본관이다. 현전하는 흥해배씨 족보에서도 배경분을 중심으로 세계가 편성되어 있으며, 1868년 간행된 《흥해배씨세보》에는 흥해군 사적과 계보, 옛 족첩의 서문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흥해배씨의 초기 계통을 확인하는 데 특히 주목할 자료는 **1596년 류성룡이 지은 「배삼익 신도비명」**이다. 이 비문은 배삼익의 아들 배용길이 가져온 행장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는데, 흥해배씨의 선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배경분(裵景分) → 4대 뒤 배영지(裵榮至) → 배전(裵詮) → 배상지(裵尙志)
비문에 따르면 배경분은 고려 때 검교장군(檢校將軍)을 지냈고, 그 후손 배영지는 전리판서·평양윤을 지냈다. 배영지의 아들 배전은 고려 왕조에서 공신에 책록되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으며, 류성룡은 이때부터 흥해 배씨의 이름이 더욱 알려졌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흥해배씨라는 본관이 형성된 직접적인 계기는 배전의 흥해군 봉작에서 찾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오늘날의 흥해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일대이며, 고려시대에는 흥해군이라 불렸다. 후대에는 옛 이름인 곡강(曲江)을 사용하여 흥해배씨를 ‘곡강배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후대의 성씨 자료에서는 배경분을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의 7세손으로 설명하고, 다시 배현경의 계통을 신라 초기의 지타(祗陀·裵祗沱)까지 연결하기도 한다. 다만 이 부분은 구분해서 서술할 필요가 있다. 1596년 배삼익 신도비에서는 흥해배씨의 선계를 배경분부터 기술하며 배현경과 배경분 사이의 계보를 제시하지 않는다. 반면 1868년 《흥해배씨세보》에는 ‘한지공사실’, ‘태사무열공사실’, ‘경주배씨 오군분파도’ 등이 수록되어 있어, 후대 족보 단계에서는 흥해배씨의 상계를 더 오래된 배씨 계통과 연결하여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흥해배씨 계보의 형성
흥해배씨의 계보는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고려·조선 전기의 가계 기록과 각 집안에서 보존하던 가승(家乘)·세계(世系)가 후대의 족보 편찬을 거치면서 하나의 통합된 계보로 정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현재 흥해배씨 족보에서는 고려시대 검교장군을 지낸 배경분(裵景分)을 1세조로 삼고, 그 후손 가운데 배전(裵詮)이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진 것을 흥해배씨 본관 성립의 중요한 계기로 설명한다. 따라서 계보상으로는 배경분을 계통의 출발점으로 삼되, ‘흥해’라는 관향이 가문의 정체성으로 확립되는 과정에서는 배전의 흥해군 봉작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다만 여기서 가문의 실제 혈통 계승과 그것을 족보라는 문헌으로 확정한 시기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현재 확인되는 중요한 단서는 1868년 간행된 《흥해배씨세보》에 수록된 이전 족보의 서문과 발문이다. 이 책에는 1606년(선조 39) 배용길(裵龍吉)이 지은 〈곡강가세구첩서(曲江家世舊牒敍)〉, 1764년의 〈갑신구서(甲申舊序)〉, 1765년의 〈갑신구보발(甲申舊譜跋)〉, 1827년의 〈정해합보서(丁亥合譜序)〉가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이는 늦어도 17세기 초에는 흥해배씨 일가에서 이전부터 전해오던 가계 기록을 바탕으로 세계를 정리하고 있었으며, 18∼19세기를 거치면서 이를 확대·통합해 갔음을 보여준다.
특히 1606년의 제목이 ‘족보(族譜)’가 아니라 ‘가세구첩(家世舊牒)’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구첩(舊牒)’이라는 명칭 자체가 배용길이 새롭게 계보를 창작했다기보다 이미 집안에서 전해오던 오래된 가계 문서를 토대로 내용을 정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으로 그 ‘구첩’이 언제 작성되었고 어느 시대까지 소급되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1606년에 흥해배씨 족보가 처음 만들어졌다”고 표현하기보다는 “1606년에는 이미 이전부터 전승되던 가계 기록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고 기술하는 것이 사료적으로 안전하다.
이후 1764년 갑신년에는 기존 세계를 다시 정리한 이른바 갑신구보(甲申舊譜)가 편찬되었다. 1868년 세보가 이때의 서문과 발문을 그대로 계승하여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갑신보가 후대 흥해배씨 족보의 중요한 저본(底本)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1827년에는 책의 서문 자체가 ‘합보(合譜)’라고 명시된 정해합보가 이루어졌다. 이는 여러 지역과 지파에 흩어진 계보 자료를 수합하여 보다 포괄적인 족보 체계로 정리하려는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1904년 갑진보에도 이 1827년 〈정해합보서〉가 계승되어 수록된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1868년(고종 5)에는 배상훈(裵相勛) 등이 중심이 되어 《흥해배씨세보》 4권 4책을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이 족보는 1606년 이래의 구첩·구보·합보 관련 기록을 한데 수록하고, 계보뿐 아니라 흥해군을 비롯한 주요 선조들의 사적, 분파도, 행렬표와 수보집사록까지 갖추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흥해배씨의 세계는 단순한 개별 집안의 가계 기록을 넘어 종족 전체의 계통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족보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1868년 세보의 편찬 원칙도 흥해배씨 계보가 어떻게 확정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편찬자는 동일한 비조(鼻祖)를 가졌다고 전해지더라도 중간 세계가 끊겨 연결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는 본계에 억지로 연결하지 않고 책 끝의 부록으로 처리하였다. 이는 적어도 19세기 수보 단계에서는 전승되는 모든 계통을 무조건 본계에 편입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확인되는 계통과 불분명한 계통을 일정 부분 구별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흥해배씨 계보의 형성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실제 가계 형성 → 조선 전기 각 가문의 가승·세계 전승 → 1606년 이전 구첩의 존재와 배용길의 정리 → 1764~1765년 갑신보 → 1827년 정해합보 → 1868년 무진세보를 통한 체계화 → 이후 갑진보 등 후대 족보로 계승
주요 분파와 세거지
흥해배씨는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러 여러 계통으로 분화되었으며, 후대 족보와 문중 자료에서는 대체로 직제학공파·백죽당공파·지평공파·관찰사공파·감찰공파·정랑공파 등의 명칭이 전한다. 다만 파명과 파조의 관직 표기는 족보의 판본이나 후대 문중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각 파의 정확한 계통은 고족보를 기준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1868년 간행된 《흥해배씨세보》는 흥해배씨의 계보뿐 아니라 제학공·백죽당·임연공·금역당공 등의 사적과 각 인물의 거주지를 함께 기록하고 있어 분파와 세거 양상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 세거 과정이 비교적 뚜렷하게 확인되는 계통은 백죽당 배상지(裵尙志)의 후손이다. 배상지는 고려가 망한 뒤 안동으로 내려와 오늘날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일대에 정착하였고, 이곳에서 흥해배씨의 안동 세거가 시작되었다. 이후 종가 계통은 금계에서 풍기 미가암리(현 영주시 안정면 신전리)로, 다시 내성현 유록(현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으로 옮겨갔다. 16세기에는 다시 안동으로 돌아와 도목촌에 정착하였으며, 임연재 배삼익이 1558년 이곳에 종택을 세웠다. 안동댐 건설로 도목촌이 수몰되면서 종택은 1973년 현재의 안동시 송천동으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흥해배씨의 역사에서 안동·영주·봉화 지역은 가장 중요한 세거권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안동 금계와 도목은 백죽당계의 초기 기반이 되었고, 봉화 석평리 역시 오랜 세거지로 자리 잡았다. 현재 남아 있는 임연재종택은 이러한 이동과 정착의 역사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후손들이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예천·의성·대구·황해도 일대에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알려진 주요 거주지로는 경북 의성군 다인면 삼분리와 황해도 은율·신천·재령 일대 등이 있으며, 후대에는 예천에도 별도의 세거 계통이 자리 잡았다. 다만 이러한 지역들은 동일한 시기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각 지파가 혼인·관직·경제적 기반 등을 따라 이동하면서 점차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본관인 흥해와 실제 세거지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흥해는 오늘날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 해당하는 관향으로, 흥해배씨라는 본관 명칭의 기준이 되는 지역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흥해배씨의 주요 계통이 반드시 흥해 지역에 대대로 거주했다는 의미는 아니며, 실제 문중의 주요 세거 기반은 안동·봉화 등 경북 북부 지역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흥해는 본관의 연원이 되는 지명이고, 세거지는 후손들이 실제 생활 기반을 형성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서로 구별된다.
흥해배씨 문화유산과 유적
흥해배씨의 역사는 족보 속의 계보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선조들이 살았던 마을과 학문을 닦던 정자, 제향을 이어온 사당과 재사, 종가에 전해지는 고문서와 문집까지 여러 형태의 문화유산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유적을 따라가면 흥해배씨가 본향인 흥해에서 출발하여 안동을 비롯한 영남 각지에 정착하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해 온 과정을 실제 공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향 흥해와 진각국사 배천희 유적
흥해배씨의 본관지인 흥해(興海)는 오늘날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일대이다. 고려시대의 흥해는 1367년 진각국사 천희(千熙)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읍격이 높아진 곳으로 기록되어 있어, 흥해라는 본관과 가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다.
흥해읍 양백리에는 고려 후기의 고승 진각국사 배천희(裵千熙, 1307~1382)를 기리는 사당과 유허비가 전한다. 이 유적은 2025년 포항시 향토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배천희라는 인물의 기억이 오랜 세월 동안 지역민과 흥해배씨 후손들에게 계승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향 유적이다.
백죽당 배상지와 가수천재사
조선 초 안동 흥해배씨의 역사를 말할 때 중심에 놓이는 인물이 백죽당 배상지(栢竹堂 裵尙志)이다. 고려 말 안동에 정착한 뒤 그의 후손들이 안동 지역에 세거하면서 흥해배씨의 중요한 한 계통이 형성되었다. 종가는 금계리에서 영주·봉화 등을 거쳐 다시 안동 도목촌으로 옮겨 갔으며, 이러한 이동 과정은 흥해배씨의 세거 범위가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의 흥해배씨 가수천재사(興海裵氏 嘉水川齋舍)는 배상지의 묘제를 위한 재사로 전해지는 건축물이다. 2009년 안동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선조의 묘소와 제향 전통을 함께 보여주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경광서원과 백죽당의 학덕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는 경광서원(鏡光書院)이 있다. 이곳에는 백죽당 배상지를 비롯하여 용재 이종준, 경당 장흥효가 함께 제향되고 있다. 흥해배씨 문중 내부의 추모 공간을 넘어 지역 사림이 배상지의 학덕과 행의를 공적으로 기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원은 훼철과 복설의 과정을 거쳐 현재까지 제향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경광서원은 흥해배씨의 역사가 단지 혈연 공동체 안에 머물지 않고 안동 사림사회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기도 하다.
낙암 배환과 낙암정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의 낙동강 절벽 위에는 낙암정(洛巖亭)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백죽당 배상지의 둘째 아들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활동한 배환(裵桓)을 기리기 위해 1451년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으며,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배환은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황해도·충청도·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낙암정은 한 인물의 휴식 공간이라는 의미를 넘어, 조선 초기 중앙 관료로 활동한 흥해배씨 인물의 삶과 후손들의 추모 전통을 함께 보여주는 유적이다.
임연재종택과 금역당
흥해배씨를 대표하는 현존 건축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안동시 송천동의 안동 흥해배씨 임연재종택(安東 興海裵氏 臨淵齋宗宅)이다.
1558년에 건립된 종택은 원래 안동 도목촌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1970년대 현재의 송천동으로 옮겨졌다. 현재 몸채와 별당인 금역당, 사당 등이 남아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종택의 이름에 들어 있는 임연재(臨淵齋)는 조선 중기의 문신 배삼익(裵三益)의 호이며, 별당의 이름인 금역당(琴易堂)은 그의 아들 배용길(裵龍吉)의 호에서 비롯되었다. 배용길은 임진왜란 당시 안동에서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사헌부감찰·충청도도사 등을 지냈다.
특히 금역당에는 ‘臨淵齋 道木村’ 등의 편액이 전하며, 이황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이 종택은 한 가문의 주거 공간이면서 동시에 학문·제향·문헌 전승이 이루어진 흥해배씨 문화의 중심 공간이었다.
기록으로 남은 흥해배씨의 문화유산
건축물뿐 아니라 문서와 전적도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 안동의 대표적인 향촌 조직 가운데 하나였던 우향계(友鄕契)에는 흥해배씨 인물 네 명이 참여하였으며, 그 활동을 기록한 『우향계안』은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조선 초기부터 흥해배씨가 안동의 사족사회와 향촌 공동체에서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또한 임연재 배삼익과 금역당 배용길을 비롯한 여러 선조의 문집·편지·시문과 종가 고문서는 당시의 학문과 교유관계, 가족생활과 향촌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금역당집』과 금역당 관련 시문 자료는 배용길의 학문적 관심과 당대 영남 사림과의 교유를 보여준다.
살아 있는 가문의 역사
흥해배씨의 문화유산은 어느 한 지역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다. 본향인 포항 흥해, 안동 입향 이후의 중심지였던 금계, 선조의 묘역과 재사가 자리한 와룡, 낙암정이 있는 단호, 종가가 오랫동안 자리했던 도목촌, 그리고 현재 임연재종택이 있는 송천동까지 여러 장소에 가문의 역사가 층층이 남아 있다.
족보가 선조와 후손의 관계를 기록한 계보의 역사라면, 종택·서원·재사·정자·묘역과 고문서는 선조들이 실제로 살아간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과 생활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기록하는 일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선조들의 삶과 학문,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을 후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연결하고, 흥해배씨가 걸어온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또 하나의 족보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